"미대에 갈래요"

"............." "............"

 고1 남들은 이과/문과를 고민하는 시절 나의 이 한마디는 부모님의 입을 멈추게 하는데 결정적인 한마디가 되었다. 그 뒤 노발대발 하시는 아버지를 뒤로한채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내방으로 데려왔다.

"왜 갑자기...? 무슨일 있는거니?"

 충분히 그럴만 했다.

어린시절 병마와 싸우며 병원에서 늘상 책만보고 그림만 끄적였다. 하필 그 당시 좋아했던 책들이 과학관련 책들이었고, "과학동아" 를 월단위로 꼬박 꼬박 받아서 보곤 하였다. 집안 곳곳에 SF 소설과 과학관련 서적이 늘어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과학/수학에 관심을 보였다. 국민학교 시절 나름 좋은 성적도 받고 심지어 꿈이 과학자였다.

 이랬던 나의 "미대" 발언은 부모님의 은근한 기대 (과학자 혹은 뭐 비슷한) 를 송두리째 꺽어버리고 심지어 얘가 어디 아픈건 아닌지의 걱정까지 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대체 갑자기 미대는 왜 가고 싶니?"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요. 디자인 쪽으로요. K대 시각디자인학과에 가고 싶어요."

 이당시에는 대학교와 학과까지 정해서 얘기할 정도로 다부진 목표를 가졌다고 어필하고 싶었다.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당시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은 '만화가' 였다. 해적판과 오리지널 버전까지 소장하고 있는 키시로 유키토 의 "총몽" 그리고 양영순씨 의 "누들누드" 이 두 작품이 내 구체적인 꿈(만화가) 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키시로 유키토는 일본사람이다 보니 그당시 알려진 정보가 없었고-지금에야 알았지만 워낙에 드문불출 하는 만화가라고 한다-양영순씨가 K대 시각디자인학과를 나온걸 알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학교와 학과를 꿈에 맞춰서 정할 수 있었다. 초면부터 부모님께 '만화가' 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어렵사리 부모님을 설득하고 미술학원을 등록할 수 있었다. 사실 이 과정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순탄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글로 쓸 수 있는 것 같다.) 부모님은 이과를 선택하면 미술학원을 보내준다고 하셨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예체능 인원이 문과와 같은 수업을 들었다. 당연히 나도 문과를 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칼자루 (돈) 는 부모님이 쥐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였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상황인데 당사자인 나는 굉장히 진지했었다. 이과 수업을 듣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모의고사도 이과에서 시험을 봤고 과학 선택도 "화학" 이었다.

 미술 학원 원장선생님도 내 이런 상황에 굉장히 의아해 하셨다. '왜 예체능으로 시험 안보냐?'. '예체능으로 시험 보면 지금보다 3~40 점은 더 높게 나오겠네'. '너는 좀 더 높은 학교를 지원하자.' '너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좋은 위치에서 시작하는 거다. 실기는 따라잡기 그렇게 어렵지 않다.' 뭐 이런 말들로 나를 꽤나 반겨주었고 가끔은 직접 지도도 해주셨다.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었다. 내 자리를 찾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수업시간에 몰래 그리던 그림을 이제는 당당하게 원하는 만큼 그리고 심지어 더 많이 그려도 뭐라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남아서 더 그리고 있으면 너무 늦었으니 집에 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반 몇달 정도는 정말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처음만 재미 있었다. 그런 말이 생각 났다. "취미를 본업으로 하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린다." 좋아서 끄적이던 낙서를 정식으로 배우고 그것이 입시미술이라는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더이상 그림 그리는게 재미있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내가 지겹게 해온 공부를 여기서 다시 하고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였을까 미술학원 가는게 싫어지고 그림 그리는게 싫어졌다. 

 왜 그런가 하면 입시미술의 성격을 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언급하면 입시미술이란 것은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게 아니라 그림을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외워서 그려야 한다. 짧은 시간 내에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미술학원을 다니는게 늘상 다녔던 수능 입시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학원 가는날 학원 가기가 싫어서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간 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길이 아니구나" 라고...

 반년정도 인것 같다. 슬슬 미술학원 가는 시간을 늘려야 하고 그에 따라서 학원비도 더 내야할 시점이었을 것이다.

"미술 안할래요. 그냥 다시 공부할께요."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껴안아 주었다.

 하지만 다시 공부하는 것은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고, 꽤나 열심히 했지만 수능시험은 당연히 딱 내가 한만큼만 나왔다. 성적표를 받았지만 오히려 담담했다. 미술하겠다고 입시 공부를 1년 정도 포기했었기에 나는 수능시험 보기 전부터 재수를 결심했다. 부모님께는 성적표가 나오기 전부터 재수하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고 나는 이미 노량진학원과 종로학원 둘중 어디가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1년 죽어라 공부해보자 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지 재수학원에서의 시간은 그저 공부만 하는 시간이었다. 결국 공대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여자들이 많다는 미대생이 아닌 남자들의 세계 공대생이 되었다. 그나마 남중, 남고, 공대 의 테크트리를 안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어머니께 물어봤다. 혹시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냐고 그래서 나보고 이과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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